미국의(아마도 국내 은행들도?) 모든 은행은 준법심사(compliance)와 관련된 부서를 운영한다. 이와 관련하여 감사팀과 리스크 팀을 분리하여 운영하기도 한다. 팀원은 대부분 변호사와 회계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으로 구성된다. 이 부서들에서 항상 신경쓰는 통칭 Volcker Rule이라는 법의 묶음이 있다. 이는 1979~19867 기간동안 Fed의 의장을 지낸 폴 볼커(Paul Vocker, 1927~2019)가 제안하고 도입한 은행의 투자행위에 대한 규제법이다. 이 법의 골자는 은행들이 특정 명목(대부분 고객 예탁금과 관련된다)의 자금들을 주식을 포함한 특정 위험 자산 군에 투기(Speculation)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볼커 룰의 시작은 07년도 말에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를 겪으면서 은행의 레버리지 투자를 규제해야 할 필요가 대두된 것이었다. 그러니 금본위제 폐지 직후부터 볼커룰이 도입되기 전인 에는 은행들이 예탁금을 원하는 곳에 투자할 수 있었다는 뜻이고, 고객 입장에서 이는 예금이 진짜 안전하게 은행에서 돌려받을 수 있는 돈인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자금을 맡은 은행이 부도나면 일단 예금자보호법에 의해 보호되는 자금 이상은 구제 의무가 없다).
볼커 룰이 등장한 배경에는 닉슨의 화폐발행 자유화 조치 이후에 잦아질 은행간 경쟁 과열에 따른 신용버블 위험과 그로 인해 예금자들에게 갈 수 있는 피해에 대한 우려가 포함되어 있다. 어째 화폐자유화 조치 이후에 30년도 더 지나서 제정된 걸 보면 정말 늦게도 된다 싶기는 한데.. 이 법으로 인해 은행은 위험거래, 소위 가격 방향성 투기를 금지당하게 되어 이를 운용하는 proprietry trader(은행의 자산을 트레이딩하는 트레이더, 주로 프랍이라고 불린다) 조직이 은행으로부터 분리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자금 자유도가 가장 높은 자기 자본 트레이딩 회사는 프랍트레이딩 하우스라고 불리며, 볼커는 금융가에서 유명할 수밖에 없는 이름이다.
의장이 되기 전을 포함하여 볼커가 연준에서 재임했던 기간은 은행사적으로 아주 혼란스러운 시기였기 때문에 그의 회고록을 읽어보는 것은 당시의 분위기에 비춰서 지금의 상황을 유추해볼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1. 초기 생애
유명한 인텔리들이 다 그렇듯 볼커는 어릴 때부터 영특했다. 뉴저지 테넥에서 어린시절을 보냈고, 어릴 때부터 정치에 관심이 매우 많았다.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명문인 프린스턴에서 학부를 마치고 하버드 석사를 거쳤고, 여름 인턴으로 뉴욕 Fed(역시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었다)에서 연구보조원으로 경험을 쌓았으며, 석사 후에는 런던 정경대(LSE)에서 후속 교육을 받았다. 그의 학부 졸업 논문은 2차대전 기간동안 연준이 인플레이션 관리에 실패했던 이유를 분석한 것이었다. 여담으로 그의 부모님은 뉴저지에서 명망있는 정치인이었는데, 어린시절의 그에게 '공무원은 비추다(...)'라는 조언을 주셨다고 한다. 물론 이후 그의 경력은...
1952년에는 뉴욕 Fed의 정규직 통화량 분석을 주 업무로 하는 경제학자로 고용되었다가, 1957년에 맨해튼의 Chase 은행에 취직하면서 Fed에서 퇴직했다. 얼마 후 1962년에, 뉴욕 Fed시절 그의 상관이었던 Robert Roosa(나중에 재무부 차관까지 승진)의 추천으로 재무부의 재무분석가로 이직했다가, 1965년에 다시 체이스 은행으로 복귀하였다(이쯤 하면 공무원이 체질에 안 맞는 것 같은데..).
이렇게 공직과 민간은행을 왕복(...)하던 볼커는 1969년에 출범한 닉슨 행정부에 의해 그를 국제 통화(international monetary) 차관으로 임명되어 정부(정치?)로 복귀하면서 커리어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2. 재무부 경력 시작에 앞서 - 브레튼 우즈 체제와 그 위기
브레튼 우즈 체제는 2차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4년에 국제 통화체계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금본위 고정환율 체제를 가리킨다. 미국은 2번의 세계대전에서 큰 역할을 하면서 경제력과 군사력을 세계에 과시하였고, 승전국의 승전국 지위를 차지하면서 이 시스템을 구축하는 동안도 협상의 주역이었다. 기축통화국이 어느 나라가 될 지를 놓고 영국과 벌인 협상에서 미국이 유리한 위치를 가져가면서 달러는 금을 직접 교환할 수 있는 유일한 통화인 기축통화의 지위를 획득하였다(사실 이는 미국 경제가 디플레의 수렁으로 빠져들어가는 단초가 되었지만..). 이때 영국의 파운드화가 기축통화가 되도록 하는 특명을 받고 미국으로 온 사람이 그 유명한 케인스였다. 결과적으로는 케인스의 완패. 교환비율은 금 1온스 당 35달러였고, 나머지 국가들은 정기적으로 달러와의 (고정)환율을 협상하였다.
시간이 흘러 1960년대 후반이 되었을 때, 미국은 상대적으로 침체를 경험하고 있었던 반면에(의외로 이때 미국의 증시는 불장이었다) 유럽은 그 이후로 다시 없었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때의 호황에 뒤따른 무분별한 재정(대표적으로 영국병)이 유럽을 서서히 지구의 중심에서 밀어내는 것은 20년 쯤 후의 일이었다.
미국이 침체를 겪으면서 브레튼 우즈 체제가 삐걱거렸던 이유는, 기축통화였던 달러의 가치가 불안정해지면서 국가 간 환율을 정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특히 독일이 2차대전 전범국임에도 불구하고 마르크화 절하로 인해 엄청난 흑자를 누리는 것과, 프랑스가 프랑화 절상으로 인해 상당한 무역 적자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정환율이라)구매력이 좀처럼 절하되지 않는 것이 큰 시비거리였다. 1968년 통화 협상이 열렸을 때, 독일은 마르크화를 절상할 필요를, 프랑스는 프랑화를 절하할 필요를 요구받았으나 불합리한 환율제도로 인해 얻는 것이 많았던 두 국가는 완강히 거부하였다.
이 시기쯤에 와서는 고정환율제의 유지가 상당히 힘들어졌고, 태환물이었던 금의 공시가격과 시장가격의 괴리가 상당히 벌어지게 되었다. 볼커는 이 시기에 외환담당관이 된 것이었다.
다음에 계속...
'책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8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서한-5 (0) | 2022.02.11 |
---|---|
폴 볼커의 회고록, <Keeping At It> -(2) (1) | 2021.08.16 |
밀턴 프리드먼, <노예의 길> 출판 50주년 서문 인터뷰-(5) (0) | 2021.01.16 |
밀턴 프리드먼, <노예의 길> 출판 50주년 서문 인터뷰-(4) (1) | 2021.01.15 |
밀턴 프리드먼, <노예의 길> 출판 50주년 서문 인터뷰-(3) (0) | 2021.01.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