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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폴 볼커의 회고록, <Keeping At It> -(2)

by Billie ZZin 2021.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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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2ndflight.tistory.com/76

 

폴 볼커의 회고록, -(1)

미국의(아마도 국내 은행들도?) 모든 은행은 준법심사(compliance)와 관련된 부서를 운영한다. 이와 관련하여 감사팀과 리스크 팀을 분리하여 운영하기도 한다. 팀원은 대부분 변호사와 회계사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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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데도 오래 걸렸고, 읽고나서도 한참 미뤘다 쓰는 감상평이긴 하지만, 내용을 이어가겠다. 아마도 이번 내용에서 볼커의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했던 기간을 다루게 될 것 같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 60년대가 되면 브레튼 우즈 체제(1944~1971)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볼커는 60년대 초~중반(케네디~린든 B. 존슨이 대통령이었던 시기)동안  체이스 은행과 재무부를 오가며 커리어를 쌓았다. 약간 희한하게도, 볼커는 거의 평생 민주당원으로 지냈지만, 그의 가장 주요한 정책활동 경력인 외화담당관(닉슨 정부, 1969~1974)과 연준의장(레이건, 1981~1989)은 공화당 정부 시절에 이루어지게 된다. 

볼커의 주요 정부 이력을 함께한 대통령인 닉슨(좌, 사진출처: snl.no), 로널드 레이건(우, 사진출처: nara.getarchive)

 

3. 재무부 경력

볼커의 본격적인 정부 경력은 닉슨이 1969년에 당선 후 내각을 구성할 때 재무부 차관(under secretary of  the Treasury)으로 발탁된 Charles E. Walker로부터 전화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볼커를 재무부 장관(secretary of the Treasury)이었던 David Kennedy에게 소개해줬고, 케네디는 볼커의 60년대경력을 인정해서, 솜씨가 남달랐던지 이미 통화사무 부차관(deputy under seretary for monetary affairs)까지 지냈던 경력,  볼커를 국제 통화사무 차관(under secretary of the Treasury for international monetary affairs, 쉽게 말해 환율업무)으로 임명했다. 

볼커가 미국의 입장에서 1969년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는 중요한 내용은 1961년 이후로 69년이 되기까지연준의 금 잔량이 아주 빠르게 소진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몇 가지 중요한 이벤트는 베트남전과, 우드로 윌슨이 시작했던 거대한 복지국가 계획이 존슨에 이르러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라는 이름을 가지고 완성단계로-그 유명한 affirmantive action(적극적 우대 조치)도 1965년에 존슨에 의해서 본격화 되었다- 접어들었다는 것이었다. 이래저래 돈을 쓸 일이 엄청나게 많아진 미국 정부의 부채는 당연히 급증할 수 밖에 없었고, 달러를 자꾸 발행하다보니 금이 부족해졌다. 결과적으로 케네디 정부 초기에는 Fed가 보유한 금으로 미국 정부 부채의 80%를 태환해줄 수 있었지만, 1969년이 되면 25% 정도만을 태환해줄 수 있는 수준까지 정부부채가 늘고 금 보유량이 부족해지게 된다. 여담으로 케네디 이전 대통령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늘어났던 정부 부채에 대한 해결책으로 긴축재정을 선택했기 때문에, 후임자들과 달리 인플레이션을 만들었다는 -주로 프리드먼에 의한- 비판을 피할 수 있었다.

이처럼 실제로도 -가끔은 소문이 사실이다- 연준은 금을 충분히 갖고 있지 못했고, 60년대 말에는 통화 거래(투기?)가 기승을 부리게 된다. 당연히 주 공격 대상은 태환국가의 통화인 미국 달러였다. 달러가 신용을 잃자 브레튼 우즈 시스템에 속해있던 국가들에서는 금을 사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나가게 되어 금 수요가 급증하였는데, 이로 인해 연준은 브레튼 우즈 때 합의된 고정 거래가인 35달러/온스로는 금을 더 이상 사기 힘든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금 시장은 정부 공식가 시장과 자율거래 시장으로 양분되게 된다(1물 1가 원칙이 깨졌다). 아마도 이때 아비트리저(arbitrageur)들은 재미를 크게 봤지 싶다. 아비트리지가 뭔지 알고싶다면 다음 포스팅을 읽어보면 된다.. ㅎhttps://2ndflight.tistory.com/30

 

아비트리지(차익거래), 노벨경제학상, LTCM, 그리고 소련

아비트리지(Arbitrage, 차익거래) 아비트리지는 자본손실 리스크가 거의 0이고 확정적으로 예상되는 수익이 있는 거래를 의미한다. 이를테면 내가 절판된 투자서 y를 15만 원에 사고자 하는 사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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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1)마지막에서 언급했듯, 브레튼 우즈 국가들 간에서는 통화정책으로 인한 긴장이 팽팽하게 전개되었다. 볼커가 재무부에 부임해 왔을 때 브레튼 우즈 시스템에 속해있던 국가들의 가장 큰 화두는 독일의 마르크화를 절상(독일은 소위 전범국임에도 불구하고 통화절하로 수출에 있어 상당한 이득을 누리고 있었다)하고, 프랑스의 프랑화를 절하(프랑스의 수출품은 대체로 식품같은 필수품들이었는데, 프랑화 절상으로 인해 수입가가 비싸게 책정되어 유럽 전역에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비난이 있었다)하는 것이었다. 물론 두 국가는 당시의 고정환율제로 인해 얻는 이득을 절대 포기하고싶지 않아했고, 협상은 몇개월 째 늘어지다가 결국 엎어졌다.

이제 달러 매도세를 진정시키고 국제통화 질서를 안정시키는 남은 방법은 금의 달러 가격을 인상하는 것 뿐이었다. 문제는 어떻게 인상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재미있게도 거의 40년 전의 대공황(1929~1933?)의 원인에 대한 입장에 따라 주장하는 정책이 나뉘었다: (1) 대공황의 주 원인이 연준이 통화량을 줄였기 때문이라는(여기도 재미있는 내용이 있다. 다른 책을 리뷰할 때 언급할 예정..) 경제학자 프리드먼은 태환 전면중지 후 금의 가격과 환율을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놔두는 시스템(floating rate)과 금 가격에 대한 개입을 전면 중단할 것을 주장했다. (2) 반면에, 그의 반대파였던  Bob Roosa는 변동환율제로 인한 통화 투기가 대공황을 불러왔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브레튼 우즈 시스템의 유지를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프리드먼의 주장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더 큰 문제를 일으키는 길로 가자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후로는 역사에 쓰인대로 최종 결정권을 가졌던 닉슨이 볼커를 포함한 관료들과의 회의 끝에 1971년 8월 15일에 금 태환 일시중지(였지만 결국엔...)를 발표하면서 변동환율제가 재개되었다. 볼커는 자기 커리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일 사건으로 이 일을 꼽았다. 결과만 보면 프리드먼이 승리했지만, 루사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어서 통화시장에는 브레튼 우즈협정 이후 유례없는 투기광풍이 몰아쳤다. 달러화 다음으로 타격을 입은건 영국 파운드화였다고 볼커는 쓰고 있고, 결국 영국도 환율개입을 한시적으로나마 중단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닉슨의 발표가 '일시중지'였기 때문에 볼커를 비롯한 재무부 관료들은 브레튼 우즈 시스템을 완전히 폐지하기 보다는, 금 가격을 재설정(말하자면 35달러/온스에서 얼마를 더 올릴 것인가)하는 -볼커는 개혁(Reform)조치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했지만 이 계획은 결과적으로 좌절되었다-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당시 키신저는 닉슨의 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얼마 후 1972년에 있었던 미-중 간의 핑퐁 외교도 그의 기획이다) 알려져 있으며, 닉슨은 키신저의 조언을 받아 계획된 유럽 순방 이전에 변동환율제로 인한 난리가 수습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헨리 키신저(좌), 닉슨-마오의 핑퐁 외교. 이미지 출처: flickr

고심 끝에 재무부가 제시할 금의 가격은 42.22 달러로 약 20% 정도 인상된 가격으로 결정되었다... 만 이미 유럽의 각 국가들은 변동환율제에 조금씩 익숙해져가는 중이었고(인플레이션은 달콤한법..), 42.22달러라는 금의 가격은 허무할 정도로 금방 넘어가버렸기 때문에 고정가격을 다시 정해야만 했다. 문제가 빠른 속도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볼커가 다시 고정환율제를 복원시키려는 노력은 IMF같은 국제기구의 개입을 필요로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와중에 72년에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고, 미국의 정계는 신용을 잃고 볼커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으면서 브레튼 우즈 시스템 복원 시도는 최종적으로 좌절되었다. 당시의 볼커는 브레튼 우즈 시스템의 지지자였기 때문에 이를 아쉬워했다고 회고하며, 불가능의 삼각정리(Impossible Triad)를 체감했노라고 썼다. 그게 뭔지는 아래 링크 참조.

https://ko.wikipedia.org/wiki/%EB%B6%88%EA%B0%80%EB%8A%A5%EC%9D%98_%EC%82%BC%EA%B0%81%EC%A0%95%EB%A6%AC#:~:text=%EB%B6%88%EA%B0%80%EB%8A%A5%EC%9D%98%20%EC%82%BC%EA%B0%81%EC%A0%95%EB%A6%AC%EB%9E%80,%ED%95%B4%EC%95%BC%20%ED%95%98%EB%8A%94%20%ED%98%84%EC%83%81%EC%9D%84%20%EB%A7%90%ED%95%9C%EB%8B%A4.

 

불가능의 삼각정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불가능의 삼각정리(不可能의 三角定理, impossible trinity or trilemma)은 먼델-플레밍 모형의 중요한 정책점 시사점이다. 불가능의 삼각정리란 환율의 안정, 통화정책의 독립성, 자본이동의 자유화 등

ko.wikipedia.org

닉슨 정부 하에서 볼커의 정책 경력은 여기서 끝나고 잠시 휴지기를 갖게 된다.

 

4. 미 연준 의장

재무부에서 퇴임한 볼커는 모교인 프린스턴 대학에서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고, 뉴욕 연준의 의장을 맡기도 했다. 1973년 10월에는 4차 중동 전쟁이 발발하였고, 이를 핑계(?)로 산유국동맹으로부터 감산조치 및 석유 단가 인상 조치가 발표되면서 인플레이션이 본격화되었다. 이것이 금융가에서 흔히 검토되는 '1974 시나리오'의 절정이다. 1974년 1월이 되면, 석유 가격은 약 3개월만에 3~4배 정도 상승하면서 모든 생산자 물가에 일대 상승이 발생한다. 그에 반해 성장은 침체되면서 스태그플레이션이 시작되는데, 미국의 경제 관료들은 경제회복(하지만 인플레이션)  vs 인플레이션 억제를 놓고 끊임없는 갈등 상태에 놓이게 된다.

프리드먼의 설명을 빌리자면, 인플레이션의 싹은 정부 부채의 확대와 함께 60년대에 심어졌다. 70년대에 인플레이션이 터져나올 때 이를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이 쟁점이었는데, 미국의 상황은 대략 이랬다: 인플레이션 -> 인플레이션을 잡아야합니다! -> 통화축소 -> 실업 증가 -> 실업을 잡아야 합니다! -> 통화발행 확대 -> 실업 축소, but 인플레이션 -> ... 하면서 반복 루프를 10년도 훨씬 넘게 탔고, 한 사이클을 돌 때마다 인플레율은 점점 상승했다. 

1977년에는 대통령이 지미 카터로 교체되었고, 볼커가 연준 의장으로 물망에 오르던 1978년에도 통화투기 현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미국의 연간 인플레이션은 1979년에 13.3%로 정점을 찍었다. 그리고 볼커는 카터의 재무부 장관이었던 G. William Miller를 통해서 지미 카터의 호출을 받았다. 볼커는 이 제안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연준 의장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재미있는 사족 중 하나는 볼커의 연봉이 New York Fed에 있을 때 -$110,000- 의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워싱턴 Fed에서 머물기 위해 대출을 받아야 했다. ㅋ

카터의 재무부 장관이었던 G. William Miller,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그가 연준 의장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통화에 대한 직접적인 조치(소위 '통화주의적 접근')를 제외한 다른 방식들 -임금인상 제한, 석유가격 제한, 환율개입 등-은 이미 효력을 다했던 것 처럼 보였고, 실제로도 그러했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을 제압하는 마지막 방법은 통화를 조이는 것 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에 따를 정치적 압력(대표적으로 실업과 부동산 가격 하락)을 이겨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큰 얼개는 다음 글에 간략하게 소개해두었다.

https://2ndflight.tistory.com/5

 

오일쇼크와 전설의 매 폴 볼커(Paul Volcker)의 활약

"COVID-19와 FED의 기조" 포스팅에서는 미국의 FED(연준) 내에서의 비둘기파(온건파)와 매파(강경파)의 의미와, 현 연준의장인 제롬파월의 성향에 대해 알아보았다. 적어도 지난 20년은 비둘기파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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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읽었던 이유는 인플레이션 당시에 상황이 어떻게 굴러갔으며, 결정 뒤에 어떤 생각이나 감정들이 있었는지를 알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이를 조금 더 자세히 다르고 넘어가야할 것 같다.

볼커는 기준금리(Fed 단기금리) 인상 목표를 기존 대비 +12%p로 한다고 발표했고, 내심으로는 단기금리만 움직이고 장기금리는 상승하지 않기를 바랐다. 바람은 여지없이 빗나갔고, 발표 첫날에 바로 채권투매가 일어나 3개월짜리 재무부 채권은 수익률 17%, 은행 우량대출은 수익률 21.5%, 모기지는 수익률 18%라는 대기록을 썼다. 장기채의 금리도 거의 동일한 수준으로 상승했다. 놀라운 사건이었지만, 볼커를 더 놀라게 했던 것은 79년에 이 조치가 발표되고 나서 증시와 모기지 시장이 박살나고, 대량해고사태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와중에도 거의 2년동안 지표 상 경기침체(reccession) 조짐은 없었고, 그와 상관관계에 있는 인플레이션이 두자리수를 유지했다는 것이었다.

81년에 카터가 낙선하고 레이건이 새롭게 대통령이 되었으나 인플레이션은 여전히 두자리로 연준의 관료들을 경악시키고 있었다. 특히 그의 지인 중 한명으로부터 '앞으로 3년간 연간 13%의 임금 인상안에 사인하고 왔다'는 말을 듣고 약간 침울한 기분까지 느꼈다고 한다. 취임 후 레이건은 불타는 현안의 담당자였던 볼커를 불렀는데, 긴장하고 있던 볼커와의 대화를 이렇게 시작했다고 한다.

"The gold price is way down. We may be getting inflation under control.
(금 가격이 많이 내렸네요. 인플레이션을 조금씩 통제해 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볼커는 이때 레이건에게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노라고 쓰고 있다. 그에 따르면, 레이건이 1981년에 파업 중에 있었던 항공 관제사 수천 명을 해고했던 일 또한 -임금 인상을 억제하여- 인플레이션을 제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82년 초에 미국의 실업률은 2차대전 이래 최대치를 마크하였다. 인플레이션은 아직 두 자리, 기준금리는 15%로 최대치였던 21%에 비하면 많이 진정되었으나, 통화수요는 여전히 목표치를 한참 상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82년 여름이 되었을 때, 인플레이션은 79년의 조치 이후 최초로 한 자리로 떨어지게 된다. 82년 말에는 인플레이션이 4%로 목표치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이때쯤부터 남미의 주택 시장이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진원지는 멕시코였다. 이후 15년에 걸친 개도국 시장에 대한 대규모 구조조정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는 우리와도 관련이 있는데, 이때 시작된 연쇄적인 구조조정 바람이 한국에선 IMF사태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볼커는 인플레이션 문제가 끝났음을 자신의 운전수를 통해 알게 되었다. 볼커는 82년 어느날 그의 운전수가 <How to live with inflation>이라는 책을 조수석에 놔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운전수도 인플레이션을 제압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나 해서 약간 침울해 있는 동안, 운전수는 책의 가격이 $10.95에서 $1.98로 내렸기 때문에 샀노라고 그에게 고백했다. 

 

5. 후일담과 연임결정

볼커는 이 사건으로 프리드먼과 그의 추종자들은 인플레이션에 관해 (좀 많이 단순화 된)다음과 같은 문장을 대중들에게 심는 일에 어느정도 성공했다고 쓰고 있다:

"Inflation is always and everywhere a monetary phenomenon.
(인플레이션은 언제나, 어디서나 화폐적인 현상이다.)"

프리드먼이 1980년에 촬영한 <Free to Choose> 다큐를 보면 그는 레이건의 경제자문열을 맡는 동안 사람들의 생각(경제에 관한 미신을 깨뜨리는)에 변화를 가져오는 일에 열심이었으므로, 그의 캠페인이 여기서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볼커는 79~82년의 인플레이션 사례와 이어지는 남미의 금융위기까지에 대해 평가를: (1) 만약 자신이 기준금리를 21%로 만들 사람이 될거라는걸 알았더라면 워싱턴으로 가지 않았을(연준 의장직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 (2) 그러므로 자신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강경한 정책이 필요할 지 몰랐으며, 다만 당시에는 상황이 매우 급박해서 이것저것 재고 있을 틈이 없었다는 것, (3)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고록을 쓸 때(2017?)가 되어 생각해보더라도 다른 방법은 없었다는 것 정도로 요약했다. 

1983년에, 볼커는 첫 임기동안 (그의 정책으로 인해 긴축을 해야했던)재무부나 의회와 상당한 예각을 세우는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첫 임기동안의 업적을 인정 받아 재신임 심사를 공화당과 민주당 의원 모두의 지지를 받으며 부드럽게 통과했다. 그는 부인 바바라 볼커(Barbara Volcker, 1932~2012)에게 더 이상의 연임은 없을 것을 약속하고 재임을 수락했다.

 

6.  2021년의 상황에 비춰보면...

87년에 볼커는 연준을 떠났고, 인류는 태환통화의 시대를 지나서 신용통화로의 이행에 대해 별 의문을 갖지 않게 되었다. 금태환 통화는 원칙을 지키는 한에서는 디플레이션으로 인한 문제를 일으켜왔다. 이는 경제학이 학문으로 정립되기 전의 사례들과, 결정적으로는 30년대의 대공황과 60년대의  통화부족(=디플레이션) 사례로부터 얻은 교훈이다(하지만 60년대부터 미국의 국가부채는 전례없는 속도로 늘어나고 있었다). 반대로 신용화폐의 문제는 통화과다(=인플레이션)로 인해 발생할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했는데, 최초의 대형사례가 70년대의 인플레이션+불황(고실업과 역성장)의 혼합이었다.

경제는 분명히 통화정책보다 더 큰 무언가이기 때문에  통화의 축소든 팽창이든 그것만으로 불경기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침체가 왔을 때 축소/팽창 중 어느 방향으로 통화가 움직일 지는 중앙은행이 결정할 수 있으며, 불경기와 그에 따르는 혼란에 대한 대응책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신용화폐로 이행함으로써 생겨날 문제에 대해서는 금본위제를 포기하던 시점보다도 훨씬 더 전에 지적이 있었고(사실 문제 중 가장 큰 것은 정부부채의 남발이지만 이는 그것이 가지는 편의 상 효과 때문에 그닥 중요하게 언급되지 않는 것 같다), 늦게 보더라도 2000년대 중반부터는 경고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때 부동산에 숏을 걸었던 간이 컸거나 지나치게 상식적이었던 사람 여럿이 파산했다.

결국엔 07년에 서브프라임 사태가 발생하면서  그제서야 신용화폐 제도에 맞춰 규제들(정작 가장 필요했던 정부의 금융시장개입을 축소하는 법은 거의 신설되지 않았다)이 신설되었다.ㅡ이처럼 제도의 변화는 현실의 변화에 후행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입법주의자들은 제도가 국가의 설계도를 제공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제도의 역할은 설계도보다는 비상장치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볼커의 연준 퇴임 이후 행적, 아마도 특이할만한 건 서브프라임 이후에 정책위원을 맡아서 금융규제들을 신설한 것들인데, 에 대해서는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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