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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경이 되면, 미국의 스태그플레이션을 상징하던 지표들이었던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그리고 성장 지표가 개선되면서 볼커의 통화정책은 널리 인정을 받게 된다. 볼커는 1987년에 8년의 연준 의장 임기를 마무리 짓고 퇴임하였다.
이후 그는 민간과 공공영역 - 특히 공공영역 - 을 오가며 여러 직책들을 수행했다. 남은 내용들은 이를 다룬다. 특히 유명한 행적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에 은행산업 전반에 대한 규제를 신설한 것이다.
7. 퇴임 직후 - 프린스턴 대학 & 부티크(Boutique)
당연한 얘기지만, 볼커는 퇴임 직후부터 금융권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구직기회를 제안받았다. 대부분은 상무나 전무이사급 자리였는데 볼커는 이를 받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은행으로 돌아가고싶은 마음이 약간 덜했던 것으로 보였다. 그가 관심을 보였던 자리는 오히려 교직 쪽이었다.
얼마 후, 당시 프린스턴의 총장이었던 빌 보웬(Bill Bowen)은 볼커에게 공무원 양성학교였던 우드로 윌슨 스쿨(Woodrow Wilson School)의 종신직(tenure)을 조건으로 교수자리를 제안하였다. 이건 구미가 좀 당겼는지 볼커는 이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교수직으로는 돈이 좀 덜 됐는지 그는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직업을 하나 더 가졌다. 이를 제안한 사람은 짐 울펜손(Jin Wolfensohn)으로, 1978년 크라이슬러 사태 당시 살로먼 브라더스 측 대표로 구조조정 계획을 조율했던 사람이었다(이 구조조정이 진행되는 동안 투자를 진행했던 유명 인물로는 피터린치와 앙드레 코스톨라니가 있으며 대략 50배 정도를 벌었던 걸로 알려져 있다). 그는 소위 부티크 펌(Boutique firm)을 차리려고 계획중이었다. 부티크 펌은 투자은행이지만, 은행의 일반적인 활동인 트레이딩과 증권발행(underwriting)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M&A 자문업만을 진행하는 은행을 일컫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티크가 얻는 이점은 영업에 있어 고객과의 이해관계상충이 생길 수 있는 소스(source)들이 상당부분 억제된다는 것이다. 볼커는 제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수락했고, 이 직장에서 1996년까지 일했다.
여느 실행가 스타일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볼커는 이론가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학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프린스턴에 재임하는 동안 그는 학생들의 요청을 받아서 이론가가 아닌 전문가들을 강연자로 초대하기도 했는데, 그 중에는 그 유명한 조지 소로스(George Soros)도 있었다. 그의 기억으로는, 조지 소로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언급했다고 한다.
"시장에는 균형상태(equilibrium)라는건 존재하지 않으며, 극단에서 다른 형태의 극단으로 지속적으로 이동한다.
변화의 트렌드를 잘 살펴야 한다."
볼커는 실제로도 이론가들이 말하는 균형이라는 개념이 잘 작동하지 않았다는 말에 동의하였으며, 그랬기 때문에 균형에 대한 조언들이 자신의 연준 경력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회고하였다. ㅎㅎ..
다음으로 볼커가 언급한 내용은 우드로 윌슨 스쿨의 실망스러운 분위기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우드로 윌슨은 정치학 교수였다가 프린스턴대 총장을 거쳐 미국의 대통령까지 했을 정도로 미국의 공공영역에 평생을 바친 인물이었다. 볼커는 공직 커리어를 쌓게 된 것, 그리고 그보다 더 전에 프린스턴 학부를 선택했던 것에도 우드로 윌슨의 이름이 크게 작용했노라고 밝힌 바 있다. 우드로 윌슨 스쿨은 하버드의 케네디 스쿨과 비슷한 정도의 입지를 가진 공직자 양성 기관이었다.
하지만 우드로 윌슨 스쿨은 공무원을 양성하는 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앞서 사진을 설명하면서 언급되었던 로버트슨의 후손들은 결국 2002년에 아카데미의 역사에 남을 소송을 제기하였다. 우드로 윌슨 스쿨에 의탁된 기금 - 로버트슨 재단 - 이 기부자의 의도와 달리, 공직자들의 훈련 외의 다른 목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소송이었다(아니 근데 프린스턴은 왜 또 그런 삽질을...). 꽤 긴 시간의 법정 공방이 진행된 후, 2009년 초 뉴저지 주 대법원은 재단 기금을 해산하고, 프린스턴 대학이 재단 측에 배상금을 지불할 것을 최종적으로 판결하였다.
볼커는 회고록에서 이 사태를 불미스러운 일로 생각하고 있는 듯 한 어조를 보여준다. 이와 함께 미국의 관료사회에 위기가 범람하고 있는 것 같다는 우려도 내비치고 있다.
이 사건이 있기 이전에 볼커는 우드로 윌슨 스쿨 소속의 경제학 담당 교수와 한번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 교수 조차도 자기 소속 대학의 설립 취지와 달리 행정에 대한 훈련을 적절한 수준의 지적 훈련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그 교수의 말로는, 공직업무, 다시말해 행정(administration)은 "경제학만큼의 지적 훈련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 지가 꽤 오랜 분위기였다.
하지만 앞서 언급하였듯 볼커는 경제학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사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경제위기들은 경제학자들의 틀린 주장들(확대재정이라든가... 확대재정이라든가...)과 그에 따를 결과들의 예측에 실패한 것이었음을 지적하고 경제학자들이 무책임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노라고 썼다. 어찌됐건 우드로 윌슨 스쿨은 공직자 양성이라는 본래 목적에서 상당히 이탈해있었다. 아마 지금은 더 그렇겠지...?
미국 뿐 아니라 어디라도 공무원은 보수가 많은 직업이기 힘들다(그래서 부자가 하는게 나아보이긴 함). 그래서 유능한 사람을 유치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 미국의 공무원 사회는 유능한 사람들을 유치하기 힘들어 인력을 민간 사업 - 볼커의 말을 빌리자면 은행이나 실리콘 밸리 - 에 내주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큰정부가 대세론이 되어가는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권한에 비해 관료의 수준은 이전에 한참 못 미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문제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지를 일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작은 정부 주의자이기 때문에 공직의 역할을 축소시킬 것을 일관적으로 주장하는 입장이지만, 어느 분야이든 유능한 사람은 필요하고, 이를 키워내지 못한 부문은 공동체 전반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었다.
8. 글래스 스티걸 법(Glass-Steagall Law)과 은행산업의 변화
20세기의 은행업을 지배한 글래스 스티걸 법은 은행사업의 남발이 대공황에 원인의 상당부분을 제공했다는 (은행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억울한...)인식에 근거하여 1933년에 제정되었다. 주요 내용은 거래 가능한 계약의 종류를 통제하여 예금과 대출을 골자로 하는 상업은행(Commercial Bank)와 증권발행/트레이딩을 골자로 하는 투자은행(Investment Bank)을 겸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통제는 기술발전으로 두 카테고리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무너지는 경향이 있다. 전산거래의 발달과, 그에 따른 증권화(Securitization)가 활발해지는 것은, 원리상 동일한 사업인 상업은행의 대출업무와 투자은행의 증권거래가 실무적으로도 동일해지는 것을 의미했다(기술적으로 채권을 사고 파는건 대출을 열고 닫는 것과 같다). 그에 따라 투자은행이 상업은행의 영역을 조금씩 잠식해 들어가고 있는 것이 20세기 후반기의 트렌드였다.
반대로 상업은행은 투자은행업에 진입할 수는 없었는데, 변화를 이끄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트레이딩 조직을 운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시기가 소위 트레이더라고 불리는 직업군의 전성기였다(어째 레전드 트레이더들은 이제와서 보면 좀 오래된 사람이었더랬다). 볼커의 임기가 끝나던 80년대 중후반에 증시는 다시 활기를 띠었고, 역사에 남을 15년 정도의 호황이 있는 동안 상기한 변화들에 파생상품 거래도 대폭 확대됨에 따라 -그 유명한 LTCM 부도가 이이 시기였다(아래 링크 참조)- 트레이더들의 몸값은 치솟았다. 헤지펀드나 사모자산운용 사업의 전성기는 이때부터가 시작이다(그리고 서브프라임으로 1차 멸망). 하지만 상업은행들은 막대한 유동성(=고객의 예금)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이 열풍에 편승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주 사업이 증권업이면서 동시에 트레이딩 조직을 운영하던, 소위 투자은행으로 등록된 은행들-대표적으로 골드만삭스나 모건 스탠리같은-은 사실상 상업은행의 역할을 겸할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 상업은행들-씨티, 체이스, etc-은 법에 따라 손해를 보는 입장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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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커에 따르면, 결정적인 사건은 씨티(Citi)가 발생시켰다. 씨티는 Sandy Well의 Travel 사를 인수하였는데, 이 회사는 또 Smith Barney라는 투자은행을 자회사로 가지고 있었다(맞나...?). 하여간 -또 다시 볼커에 따르면 준법의 체이스와- 우회의 씨티랄까... 씨티는 이 인수의 결과로 씨티그룹(Citi Group)으로 회사명을 변경하였다.
이는 상업은행 부문에서 우세한 지위를 점하고 있던 씨티가 글래스-스티걸 법에 도전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신사는 채권을 좋아한다(Gentlemen prefer bonds; 사실 신사는 금발(blonds)을 좋아한다는 더 구식 농담의 변형이다)."는 구닥다리 영국 농담처럼, 한 세기 전까지 위험부담이 큰 증권놀음이 주사업이었던 투자은행업은 상업은행업보다 천시받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과 지식 - 구체적으로는 블랙 숄즈 방정식 - 의 발전에 힘입어 투자은행은 드디어 수익성을 인정 받고 상업은행들도 넘보는 사업이 되었다.
이제 글래스-스티걸 법은 도마에 오르게 되었다. 이미 씨티의 인수가 합법으로 결판난 이상, 글래스-스티걸 법의 폐지는 시간문제였다는 볼커의 예상대로 법은 1999년에 정식으로 폐지되었다. 글래스-스티걸 법의 폐지와 맞물려서 단순 스프레드 장사(=예대마진)에만 묶여있던 엄청난 규모의 예금들이 증권화(Securitization)에 동원되어 시장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엄청난 규모의 자금 유입이었다.
여기부터 금융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인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싹이 텄다고도 볼 수 있다. 이른바 고객과 은행 간 대리인 문제다. 고객의 수탁금을 가지고 트레이딩을 할 수 있게 된 대형은행들은 모두 프랍 트레이딩(Proprietary Trading, 자기 자본 거래) 부서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게 뭐 별거인가 싶지만, 사실 이 시기부터 예금이 안전자산이라고 할 수 없게 된 것이다(물론 그 전에도 은행 부도는 심심찮게 발생했기때문에 완전히 안전한건 아니었다). 어떤 이유로든 프랍이 예기치 못하게 큰 손실을 낸 은행은 준비금(reserve)이 부족해져 예금자의 돈을 내주기 힘들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론상"으로는 예금자 보호에 관한 내용들을 폐지하고 금융에 대한 거의 전면적 자율화를 선언하는 것도 가능은 하다. 하지만 이는 상당한 수준의 담력을 요하는 일일 수 밖에 없고 훨씬 직관적이지 않은 방법이라서 홍보가 이루어지기 어렵다(글쎄, 통장 출금이 안되네?). 어쨌든 과거에는 이런 종류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거의 퍼져있지 않았기 때문에 - 당장 은행이 돈 번다는데 왜 내 예금이 위험자산이 돼버리는지를 추론하는건 고사하고 이해도 잘 안될건 뻔하지 않나 - 위험 자체가 간과되는 효과를 가져왔다(지금의 상태는 너무 과잉해서 주의하고 잇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저런 사건들을 거쳐서 마침내 상업은행들은 투자은행들을 자회사로 둘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 서브프라임 때 금융사들의 인수합병의 결과인 경우까지 포함하여 - 상업은행과 증권업을 같이 운영하는 회사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JP Morgan은 Chase Bank를 가지고 있고, BoA는 Merrill Lynch를 가지고 있다든가 하는 식이다. 이전까지 없었던 증권화(Securitization)의 붐 속에서, 미국의 금융업은 전에 없던 파생상품의 홍수를 맞이하게 되었다.
볼커는 증권업의 폭발적인 성장(?)에 대해 언젠가 헤지펀드의 성과비율인 샤프비율(Sharpe Ratio)로 유명한 금융공학의 전설 윌리엄 샤프(William F. Sharpe)와 대화를 나누었던 적이 있다. '파생상품이 GNP로 따져서 어느정도 국부를 성장 시킬 수 있느냐?'는 질문에 샤프는 "전혀 없다(Nothing)."이라고 대답했으며, 이어서 '그럼 파생상품이 하는게 뭔가?'는 질문에는 "경제적인 지대 내지는 임대료를 금융 시스템에 포함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답했다. 이 사건으로 볼커는 파생상품이 뭔가 일을 낼 것같다는 확신을 얻은 것 같다.
다음 내용은 글래스-스티걸 법 폐지 이후 볼커 자신이 은행-산업 분리에 관한 신념을 표출한 것과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그리고 볼커의 인생소회를 다루고 독후감을 마무리 짓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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